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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04 헝거 게임 - 서바이벌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음증이 만든 핫hot한 소설!
  2. 2010.02.18 애도하는 사람 -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헝거 게임 - 서바이벌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음증이 만든 핫hot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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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바이벌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음증이 만든 핫hot한 소설! 

  TV 프로그램 중에 ‘몰래카메라’라는 게 있었다. 스타를 데려다 황당한 사건과 에피소드로 장난을 치고는 그들이 놀라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담은 쇼 프로그램. 일요일이면 ‘누가 어떻게 당할까’ 기대하며 나는 TV 앞에 앉았고, 예의 한 두 시간 스타를 골려먹는 짓에 가담한 듯 희희낙락하던 때가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영화 중에는 ‘트루먼 쇼’가 있다. 시청자들이 아예 한 사람의 생활을 ‘몰래 카메라’로 들이댄 설정이다. 1998년 당시만 해도 ‘트루먼 쇼’의 각본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도 안 되는, 하지만 대단히 놀라운 설정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는 시청자들의 모습에서 미디어와 대중이 지닌 관음적 폭력성에 대해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오늘날은 변해 나 자신의 사생활도 언제 표적이 되어 인터넷에 공개될지 모르는 세상이 도래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어딘지 모를 곳에 설치된 CCTV에 내 모습이 담기고(누가 보고 있을까?), 유희거리를 찾는 방송국 카메라를 대신해 시청자들이 직접 휴대전화에 부착된 카메라로 수많은 눈이 되어 주변에 번뜩이며 무료로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그들은 왜 담고 있을까?). 그리고 인터넷은 스타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사생활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 세상에 뿌리고 있다.  

  나아가 이제는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평범한 일반인들이 ‘스타되기’라는 명목으로 보여주기를 스스로 자처하며 카메라 앞에 서는 세상이 되고 있다. <헝거 게임Hunger Game>(북폴리오)같은 소설이 나온 것도, 그리고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이유도 관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 때문일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라고 해 두자. 북미라는 대륙이 잿더미가 된 뒤 들어선 판엠은 캐피톨이라는 빅 브라더 같은 존재 아래 열세 개 구역이 주위를 둘러싼 나라다. 어느 날 열세 개의 구역이 판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모두 패했다. 심지어 열세 번 째 구역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헝거 게임Hunger Game은 그런 암흑기를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계몽 이벤트다.  

  각 구역마다 남녀 청소년 각각 두 명이 ‘조공인’으로 선발되어 한 사람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는 게임. 그리고 최종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의 전 과정은 TV로 방송되는 리얼 서바이벌 게임이다. 우승자는 스타가 되어 평생 굶주림 없이 편히 살게(소설의 제목에 유념하자) 되고, 우승자가 탄생한 구역은 다른 구역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동안, 고급 식량을 선물 받는다.   

  “각 구역에서 아이들을 데러가 서로 죽고 죽이게 하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들에 비해 얼마나 무력한지,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켰을 때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이 그 얼마나 희박한지 일깨워주는 캐피톨의 방식이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 간에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똑똑히 봐둬. 우리가 너희 아이들을 데려다 희생시켜도.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너희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박살내버릴 거야. 13번 구역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야.”“   

  관음을 즐기는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지극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설정에 읽기를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본성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TV 앞에서 선 열 두 구역의 누군가가 되어 캣니스의 승리에 열광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나와 같은 권력에 복종하는 평민이고 일반인이었고, 마침내 현대인의 영웅, 스타가 된다.

  또 하나 매력인지 마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관객이 되어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돈을 지출하며 스폰서가 되어 헝거 게임의 참여자들을 후원하는 시스템은 팬들의 스타 만들기와 다름없다. 독자로 하여금 가능하다면 후원하고 싶도록 만든다. 또한 그것을 은근히 의식하며 때로는 연출하는 주인공의 심리도 엿보게 된다. 발칙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늘 그렇듯 결말이 뻔한 스토리지만 그 속에는 늘 같은 무게의 묵직한 카타르시스가 들어있다. 소설의 흥행요소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소설, 컨텐츠는 원소스 멀티 유즈로 활용되고 있다. 소설의 흥행은 영화로도 이어져 현재 한창 제작중. 그 때를 참지 못한 독자들은 자체적으로 팬메이드 무비fan-made movie를 제작해 유투브에 올리고 있다. 헝거 게임에 몰입하고 열광하는 독자들을 짐작케 한다.   

  이 소설은 단편이 아닌 3부작. 스타가 된 우승자 캣니스의 앞날은 그녀를 마득찮게 여기는 대통령의 시기에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또한 함께 참여한 12구역의 남자 조공인 피타와의 로맨스는 그림자 같은 오랜 친구 게일과의 삼각관계를 예고하고, 캣니스는 구역인들에 의해 우승자에서 영웅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된다. 스티븐 킹은 이 책의 ‘강한 중독성’을 추천했고, 트와일라잇의 스테프니 메이어는 ‘헝거 게임’만이 가진 ’매력’을 칭찬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현대인의 관음증을 한탄하면서도 온라인 서점에서 2권 주문을 서둘렀다. 이런 아이러니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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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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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텐도 아라타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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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액션과 스릴러 영화를 보면서 언제부턴가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건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부으며 영화를 보면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정말 김빠지는 못된 버릇’이다.다름 아닌 주인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죽던지, 살던지, 이기던지, 지던지, 복수를 하던지, 결국 영웅이 되던지 온 신경을 쏟으며 주인공에 주목해야 온당할진대 어느 때부터 엑스트라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독자들이 이 글을 읽는다고 해서 절대로 따라하지 말기를...그러면 영화는 정말 혼란스러워지고, 재미없어진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주인공이 함부로 쏘아댄 총질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총알을 받고 최대한 절규하며 스러져가는 이름 모를 악당들을 보면서 ‘저 이도 남의 집의 귀한 자식이고, 아버지일텐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허구의 이야기를 배우들이 영상으로 찍은 것’이라는 본질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비교적 영화에 동화되어 주인공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지만, 다만 악당들을 쓰러뜨려야 할 상대가 아니라 ‘그들도 사람’이라는 곁눈질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100 분이라는 상영시간을 채울려면 주인공은 당연히 살아야겠지만, 그 사이에 죽어가는 악당들, 아니 사람들에게 연민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웅은 이름 모를 수많은 희생을 밟고 일어선 자‘라는 말도 있듯이 일반적이라면(평범하다면) 살아남은 영웅에 주목해야 하거늘, 영웅의 발 알래 밟혀있는 사람들에 포커스가 가더란거다. 이 일반적이지 못한 관점은 액션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급격하게 떨어뜨렸다. 나아가 총알에 스치거나 악당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에게는 혀를 차면서도, 되도록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이 나며 죽어가는 악당에게는 박수를 치며 시원해하는 내 감정이 과연 옳은건가 의심하게 되었다. 이 정도쯤 되면서부터 그런 류의 영화는 볼 짱 다 봤고, 오랫동안 누리던 작은 즐거움이 사라져버렸다.

 

  오래 전 무슨 사건을 접했다. 아마도 식사를 하면서 뉴스를 보던 중 그 일로 몇 명이 희생되었다는 보도를 들었던 것 같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이 자꾸만 눈에 밟히듯 들어왔다. 아래는 그날 밤 블로그에 적은 몇 글자다.

 

 

죽음을 지켜보는 마지막 증인인 가족이 함께 함은

저승의 문턱에 있는 '곧 죽을 자'에게는 큰 위안이 될 듯 하다.

반면에 지켜보지 못한 가족에게는 죄스러움과 아픔이 되어

자신의 주검까지 남겨지겠지.

곧 다가올 죽음에 무언가 꼭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에는

충분히 다 주지 못한 자신의 사랑이 아쉬워서 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평온하게 살던 중에 갑자기 닥친 자신의 죽음을

깨닫기도 전에, 알리기도 전에 차마 눈감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수많은 영정들에게 유감스럽다.

나와 내 가족을 그 자리에 앉혀놓자니

끔찍하기가 그지없다.

..........

배고픔을 알고, 시장기를 속이는 자리에

비극의 소식들이 계속된다.

속이 상해 '밥알이 곤두설까' 전원을 끄자니

죄송함과 간사함이 교차한다.

살아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어제와 오늘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만 불쌍하다.' 

 

  탄생과 죽음은 동일선상에 있다. 지금 이 시간 어느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이가 태어나듯 누군가는 죽는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삶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그래서 나와 내 주위의 사람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삶도 채 인식하지 못했던 철부지 시절에는 결코 없었던 생각, 요즘 들어 들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었다고 느낀 것일까. 텐도 아라타天童荒太의 <애도하는 사람 悼む人>(문학동네)이 눈에 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지 모른다. 제목을 읽는 순간, ‘지금의 나’를 위한 책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애도하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특별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다는 걸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사내가 일본 전역을 돌며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애도하고 있다. 죽음에는 이유도 필요 없고, 경중도 없다. 사내가 펼쳐 본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누군가의 부고(訃告)가 눈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 사내의 애도를 받는다. 사내는 그 어떤 꾸밈도 없이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일본을 돌며 그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왜 일까? 무엇 때문일까? 그것보다 이 소설을 쓴 작가 텐도 아라타는 무슨 생각에서 이런 소설을 쓰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나아가서는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묵숨에 대해서도 경중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죽음도 차별이나 구별 없이 그저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했고, 거기서 희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 작가 인터뷰 중에서 

  젊은 사내 시즈토는 성직자도, 어느 종교단체의 회원도 아니다. 그냥 직장을 다니던 평범한 사람이다. 단지 여섯 살 때의 기억, 태풍으로 땅에 떨어져 죽은 새끼 직박구리 새의 주검을 대한 기억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죽어서 둥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새의 주검을 엄마(준코)와 함께 땅에 뭍고난 후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 알아. 베란다에서 내내 지켜 봤었거든....이 아이, 아빠랑 엄마 쪽으로 목을 길게 뽑고 울었어....하지마 지금은 여기 잠들어 있어...그걸 아는 건 나하고 엄마하고 이 아이 엄마하고 아빠뿐이네...우리가 잊으면, 이 아이의 엄마하고 아빠밖에 기억하지 못하겠네....(중략)... 어떻게 해야 좋을까...어떻게 하면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중략)...(두 손을 가슴 앞에 가져와 심장으로 밀어넣듯이 포개며) 여기에 넣어둘꺼야...잊지 않도록. 이 아이, 여기에, 넣어 둘 거야.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걸...내 안에 넣어둘 거야.” 본문 123-124 쪽  

  탄생이 듦이면 죽음은 낢이다. 없고 난 이후의 사람을 애도함은 기억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망각을 위한 동물인지라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무모하리만치 엉뚱한 시즈토의 행보가 바보스러우면서도 보기 좋은 우리네 명절을 쇠기 위한 고향 방문을 닮았다. 바로 굳이 함께 기억하고 싶어서다. 남겨진 이들에게 죽은 조상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제상을 놓고 절을 한 후 조상이 음식을 드시는 동안 편히 드시라고 뒤를 돌아 등을 지는 순간은 바로 조상을 기억하는 순간이다. ‘내 기억 속에 남겨진 조상’을 서로 추억하는 순간, 삶과 죽음이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시즈토가 인상적인 것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애도하는 것이다. 죽은 이들에게 경중을 두지 않고, 제가 아는 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려 했다. 애도하는 것은 결코 즐겁지 않은 일, 오히려 고통스러울 법 한데 오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만의 애도하는 법 때문이다. 

  “고인을 기억할 때 죽음의 비참함과 비애가 아니라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만 기억하기로 했다고 한다. 긍정적인 면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다르겠지만, 몇십 명, 몇백 명이나 되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떤 인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 가지 요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본문 265 쪽 

  이름을 불러 꽃이 되듯, 없는 이는 기억하매 가슴 속에서 되살아난다. 내가 그(녀)를 기억함은 사랑을 하는 것이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매개는 결국 사랑이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소설이 일본에서 큰 상을 받고 많은 반향을 일으킨 것은 유독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일본사회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밀려 인본주의가 점차 자리를 잃고 있는 경향은 그 어느 곳이든 매한가지다. 자연재해로 수많은 목숨이 잃어가는 현장 앞에서, 가난과 기근으로 숨을 헐떡이는 모습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밥상을 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가져가는 내 모습이 어찌 일본사회를 폄하할 수 있을까.

  비록 허구지만 시즈토가 반가운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이기적인 내가 저자의 말대로 ‘한 명쯤은 있으면 하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를 쫓으며 동감하고 위로받았다. 문학의 목표가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했다. 하지만 끝끝내 나는 시즈토처럼은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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