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나는 요즘 남자]한없이 나약한 그 이름,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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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나약한 그래서 지지가 필요한 그 이름, 남자

 

 

   요즘 ‘남자’가 말 그대로 대세다. TV 골든타임을 보면 특히 중장년이 예능계를 주름잡고 있다. <아빠 어디가> <꽃보다 할배> <진짜 사나이>를 비롯해 <백년 손님>과 <정글의 법칙>까지...이들 프로그램은 요즘 시청률이 상당하다는 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현실이 아니라는 거다. <아빠 어디가>는 자식에게 그간 못 다한 사랑을 베푸는 ‘로망’이고, <진짜 사나이>는 구구절절 ‘그때가 좋을 때다’하며 실실거리게 하는 ‘추억’이다. <꽃보다 할배> 역시 여러모로 암울할 것만 같은 ‘실버 그레이 세대’를 살짝 ‘기대’하게 만든다.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여자(아내)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가 있었더라면 예의 뒤에서 미소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엑스트라였을 남자(남편)들이, 느닷없이 주인공이 되자 아예 판이 뒤집어졌다. 이 ‘색다른 재미’가 요즘 대세의 이유다. 한편 이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남자들은 ‘나’를 보기 시작했다. 좌충우돌하는 남자 주인공들에 몰두하다 보니 문득 그 속에 내 모습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아내)에 묻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나, 그간 깨닫지 못한 또 다른 나를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게 무척 반가웠고 신기했다. 그렇다. 걸그룹이 아닌 남자가 주인공인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남자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주인공 속에서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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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에 비추면 ‘남자에 대한 고민’에 대한 트렌드는 책이 한참 앞섰다. 우선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쓴 <남자들에게>는 1995년에 출간되어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 나는 20대 중반에 이 책을 읽고 ‘남자의 스타일’을 배웠다.

 

"무엇이든 제 스스로 생각하고, 그것에 의해 판단하고, 그 때문에 편견을 갖지 않고, 무슨 주의 주장에 파묻힌 사람에 비해 유연성이 있고, 더욱이 예리하고 깊은 통찰력을 가진 남자다. 또한 자기 자신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무슨 어려운 학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대처하는 ‘자세’(스타일)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말이다. 따라서 연령도 관계없고 사회적 지위나 교육의 고저도 관계없고, 그저 그것을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외설논란이 거셌던 베스트셀러 소설 <실락원>의 저자로 유명한 ‘와타나베 준이치’의 <남자라는 것>과 <남편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70평생의 삶과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자들이 모르는 남자에 대한 심리(특히 성性에 관련된)를 적나라하게 서술했는데, 갓 서른을 넘긴 나에게는 이 책들이 이등병이 듣는 말년 병장의 모험담처럼 느껴질 만큼 유익했다. 1998년의 IMF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은 국부國富도 잃었지만 남자男子도 잃어버렸다. ‘그 날’ 이후로는 1퍼센트의 ‘돈 잘 버는 남자’만 남자 대우를 받는 ‘드러운 세상’이 되었다. 돈 잘 못버는 남자가 믿을 건 ‘로또’ 뿐이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의 한 대목은 오늘날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남자 모습을 잘 보여준다.

 

“나는 동창회가 싫다. 월급, 몰고 다니는 자동차로 사는 수준을 판단하고 행복을 가늠하는 눈치들이 싫어서다. 회사에서는 어느 줄이 튼튼한 동아줄인지 잘 판단해서 줄서야 하고, 사는 순간 '상투 잡아 인생을 저당 잡힌 하우스푸어다. 나는 매주 금요일에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월요일에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 로또가 된 줄 알아. 지중해에서 유람선 타고 있을 거야. 나 찾지 마." 로또를 가득 채워 두 장을 샀다. 그렇게 만원을 날렸다. '정말 로또 밖에 답이 없는가' 고민도 하지만, 다음 주면 나는 또 일주일의 꿈을 만원에 사고 있을 것이다. 밀린 주택담보 대출금 갚으려면, 대학을 앞둔 큰 딸 과외비대려면 나는 오늘도 일해야 한다. 나는 아프면 안 되는 몸이다.”

 

          

 

   요즘 남자를 다룬 책들은 남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십년 전에 비해 무척 달라졌다. 지치고 나약한, 그래서 위로와 지지가 필요한 남자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젠 아빠를 부탁해>는 제목이 말하듯 점점 무너져가는 이 시대의 아빠가 아이에게, 아내에게, 사회와 국가에게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도자들에게 나를 봐달라고 구체적으로 부탁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오면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온 요즘 아빠들의 현재를 잘 그려내고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러미 스미스가 쓴 <아빠의 이동>은 엄마는 돈을 벌로 아빠는 아예 ‘집사람’이 되어 살림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자의든 타의든 아빠가 직장대신 집에서 살림을 꾸리는 가정이 늘어 2007년 현재 14만 3천 명이나 된다고 하니 ‘주부 남편’은 21세기 우리의 생활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저자가 두 살 된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바탕으로 주부 아빠로 지내면서 얻은 기쁨과 내적인 갈등, 두려움, 불편함, 그리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감을 털어놓으며 살림하는 아빠도 가족을 위해서는 ‘나름 괜찮다’고 말한다. 한편 <남자의 공간>은 삶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든 현대 남자들에게 ‘골방’을 제시한다. 집에서 남자의 공간이란 담배 피우는 베란다가 전부일 뿐, 남자들의 방은 남질 않는게 현실이다. 현대 남자들이 술집, 노래방, 룸살롱 안마 시술소, 포장마차를 전전하는 이유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공간이 없어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 책이 말하는 ‘골방’은 장소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마음 편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위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기도 하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시인의 시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외적인 사랑과 내적인 외로움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는 이 시를 십여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거의 한 시간을 펑펑 울었다. 그 때는 추호(秋虎)처럼 무서워 30년 동안 제대로 말도 나눠보지 못한 아버지를 병환으로 잃은 지 몇 달 후였는데, ‘우리 아버지 마음도 이랬구나’ 싶어 장례 때 흘리지 못한 눈물을 이 시에 다 쏟았다. 우리 중 누구는 이미 아버지고, 다른 누구는 아직 아버지가 있다. 남은 누구는 아버지가 될 남자다. 남자가 지금 힘든 데는 ‘이 단어’ 탓도 있을 것이다.

 

   내가 최근 읽은 책 중에서 남자를 이야기한 가장 두드러진 책은 명로진의 <남자의 교과서>였다. 저자는 여자는 죽어도 모르고 남자는 절대 말하지 않는 남자의 본심을 일, 가오, 눈물, 권력, 섹스, 축구 등 46개의 단어 속에 잘도 담아냈다. 글빨 좋은 저자의 농짓거리에 키득거리다 보면 말미엔 어김없이 내 맘을 들켜 ‘옳거니’하고 박수치게 된다. 저자는 여자 독자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오로지 남자에 집중해서 썼다. 남자 셋이 둘러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놓고 진짜 남자를 말한다면 들을 수 있는 단어들이 대박으로 등장하는, 그래서 ‘100퍼센트 레알 멋진 남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윤용인의 <남편의 본심>은 와타나베 준이치의 <남편이라는 것>보다 열 배는 나은 책이었다. 딴지일보 기자 출신이자 결혼 20년 차를 맞은 한 중년 남자가 밝히는 남편의 속마음은 정말 ‘내 맘’ 같았다. 집에 오면 말없이 TV만 쳐다보고 있는 남편의 속마음은 실은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 여기저기에 쌓아둔 감정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남편도 아내만큼 복잡하고 섬세하며 강한 척하는 남자들도 사실은 더없이 이해받고 싶은 존재라고 밝힌다. 읽다 보면 쪽팔려서 덮고 싶지만, 그 쪽팔린 이야기가 현실이라 페이지를 접게 된다. 읽다보면 내 마음 같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란 걸 알게 된다.

 

 

     

 

   김정운 교수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는 갑작스런 변화에 방향과 목표를 잃은 한국 남성들에게 일과 가족에게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백열등 부분조명과 하얀 침대 시트’, ‘아침의 갖 볶은 커피 갈아마시기’, ‘향수뿌리기’ 등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통해 ‘혼자라도 행복해지라’고 권했다. 수십만의 독자들이 그의 말에 공감했다. 이러한 소극적 행복은 <남자의 물건>에서도 이어졌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남자란 아이덴티티를 먹고 사는 동물이라서 어떤 것이든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직함이 필요하고, 그 옆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매개해주는 물건이 있는 법인데, 그래서 남자에게는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이어령의 물건은 3 미터짜리 책상이고 신영복은 아버지의 벼루, 안성기는 스케치북 '내 물건'이었다. 김정운은 60개가 넘는 만년필이었는데, 당신 아빠의 만년필이 한없이 좋아보였던 때문이란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당신의 물건'은 무엇인가?

 

   남자의 노년을 잘 그린 영화 <버킷 리스트>는 국내에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자동차 정비사였던 카터(모건 프리먼)은 죽음을 앞둔 암병동에서 잘나가는 사업가 에드워드(잭 니콜슨)와 한 방을 쓰다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나는 누구인가’를 정리하고, ‘죽기 전에 하고 싶던 일’을 다 하기로 공모한다. 이른바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기 위해 두 사람은 병원을 뛰쳐나가는데, 자살과 다름없다며 아내가 극구 반대하자 카터는 울부짖듯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지금 죽어가고 있어. 내가 두려울 것이 뭐야? 난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평생을 살아왔어. 후회하진 않아. 하지만 이젠 ‘나’를 찾고 싶단 말이야.”

 

 

         

 

 

 

   세렝게티에서 사냥하기, 문신하기, 카레이싱과 스카이다이빙,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 보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 등 카터가 꼭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별 것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누구의 나’가 아니라 온전히 ‘나’로서 ‘죽기 전에 하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였다. 버킷 리스트는 살아가는 동안 지워나가야 할 '행복충전기‘이자 나만의 목표, 그리고 꿈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뒤적거리며 던진 질문 하나는 ‘이 시대의 행복한 남자란 어떤 남자일까?’ 였다. ‘이런 남자다’라는 명쾌한 답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일 내(남자)가 가족으로부터 사랑받고 지지받는다면 행복한 남자가 아닐까. 여전히 가족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 답을 이미 안다. 집 밖을 나서면 동서남북으로 눈썹이 휘날리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야한다는 것을.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발행하는 출판전문저널 <기획회의>(351호)에 기고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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